김진숙초대전
- 전시장소
- 세종갤러리
- 전시기간
- 2020-07-07 ~ 2020-07-19
- 전시내용
- 질감으로 이루어진, 그릴 수 없는 자연
본문
질감으로 이루어진, 그릴 수 없는 자연
회화는 이미지이자 물질이기도 하다. 그것은 허상과 환영의 영역에 속하지만 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구체적인 물질로 자존한다. 어쩌면 회화란 물질과 이미지 사이의 긴장 관계 속에서 제 삶을 모색하는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환영으로 마냥 기울다가 어느덧 물질로 환원되기를 반복하기도 하고 아예 그 둘을 한 화면에 동시에 보여주기도 했던 역사가 미술사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이미지만으로, 물질만으로는 존립할 수 없는 것, 그러니 물질과 이미지가 불가피한 공모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눈과 마음에 파장을 일으켜 어딘가로 몰고 나가는 여정이 실은 그림의 길인지 모르겠다.
김진숙의 회화를 단순화해서 표현한다면 물질을 빌어 외부에서 지각된 경험의 세계를 다시 보여주는 일이다. 외형적으로는 추상화에 가깝지만-단색으로 칠해진 배경과 그 위에 점착된 두터운 물질감으로만 형성된- 여전히 그 이미지는 자연계의 풍경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중력의 법칙에 의해 바닥을 향해 무겁게 늘어진 나뭇가지나 벅차게 부푼 꽃다발, 혹은 수직으로 도열한 나무의 모습이다. 혹은 바람에 흔들리거나 뒤척이는 식물의 군집을 무척이나 서정적으로 떠올려준다. 물론 그러한 인상은 다만 그 덩어리를 통해 유추되는 상상일 뿐이다.
물질덩어리로 점유된 화면이 묘하게 특정 자연의 한 장면을 선사하는 그림인 동시에 구체성과 추상성을 동시에 함유하면서 다가오는 다소 낯선, 이상한 그림이기도 하다. 얼핏 봐서는 그것이 개나리인지 버드나무인지 또는 담쟁인지를 잘 알아보기는 힘들다.
예를 들어 다소 어둑하게 가라앉은 색상을 배경으로 강한 요철감을 지닌 체 붙은 흔적/선은 마치 상처와도 같은 데 또한 담쟁이기도 하다. 아울러 노란색의 색채 더미가 산처럼 자리한 것은 실은 개나리이기도 하다. 이처럼 작가는 자신의 삶의 주변에서 만나는 가장 흔하고 비근한 자연/식물계를 소재로 해서 다루며 이를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일종의 전형성의 상태에서 건져 올리는 것이 아니라 미처 그것이 개나리나 담쟁이인줄 모르는 상태에서 문득 마주쳤을 때의 낯설음을 포착하려는 것도 같다.
화면 속에는 자연의 구체적인 형상, 윤곽은 부재하다. 다만 평면적으로, 매우 납작하고 단일한 색조로 밀착된 배경을 뒤로 하고 상당히 촉각적이고 입체적/부조적인 물질감이 두드러지게 자리하고 있다. 약간의 색차를 지니면서 화면의 상당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이 덩어리는 좌, 우측에서 밀고 나와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 형국을 연출한다. 이 덩어리의 내부는 조밀한 색 점, 색/물감이 산포되어 있을 뿐이다.
작가는 화면 바탕에 모델링 페이스트를 이용해 두툼한 질감효과를 만들어 캔버스 표면을 성형해놓았고 이후 그 위에 물감을 얹어 놓았다. 따라서 물감 자체가 두툼한 질감을 형성한다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가시적 세계에서 배제된 그러나 바닥을 견고하게 지지해주는 일종의 틀이 우선하고 그 위에 얹히는 물감의 효과가 무겁고 중후하며 엄청난 마티에르 효과를 증폭시키는 편이다. 그리고 이 마티에르는 빛을 모아주는 효과를 발휘해 화면에 생동감 넘치는, 생기 있는 자연의 활력을 감지시키는 기제로도 작동한다.
이러한 물질의 연출은 아마도 두 가지 효과를 겨냥한다고 본다. 첫째는, 일반적인 구상화의 전략으로 자연을 재현하는 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보인다. 그러니까 자신이 감동적으로 접한 자연계의 한 장면을 재현한다는 것은 단지 외형의 재현, 묘사 등으로는 실현되기 어렵다는 방증이다. 혹은 다소 관습적인 구상화의 재현술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이다.
둘째는 본인이 체득하고 깨달은 자연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나 감동은 외형적인 묘사, 닮은꼴만으로 충족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얘기다. 결국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특정 식물/풍경의 지시적 형태감에 겨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받은 자신의 감동, 충격, 정서적 경이감 같은 것, 무엇이라 설명하기 힘들고 재현될 수 없는 다만 모종의 느낌으로만 다가오는 그것에 대한 물리적 반응의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아마도 그래서 두터운 질감효과, 모호한 덩어리, 그리고 그 위에서 예만하게 진동하는 선과 빛을 받아 진동하는 물감의 입자들이 자아내는 특정한 효과를 산출하는 표면의 처리 등 여러 전략이 구사되는 것도 같다.
그에 따라 이미지와 물질이 동시에 존재하는, 그 둘의 공존으로 이루어진 그림이 만들어졌고 시각에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촉각에 의미하는 화면이 자리했다. 그리고 이는 자신만의 그림에 대한 고유성에 대한 방법론의 고민도 묻어 있다.
그림은 그릴 수 있음과 그릴 수 없음 사이에 끼여 있다. 아니 그 둘 사의의 관계 아래에서 이루어지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어느 날 개나리 군집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꽃이 피기 전까지는 구체적으로 어느 나무인지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초봄의 기운이 덮치면 개나리는 꽃을 피우고 비로소 제 존재를 온 세계에 힘껏 알린다. 생경한 노랑의 색채가 우리 주변을 물들이면 그제야 사람들은 눈길을 주고, 그곳에 있었던 것들이 개나리였음을 뒤늦게 깨닫는 식이다. 또는 칙칙하고 습한 담벼락에 기생해 나가는 담쟁이의 강인한 생명감도 사실 제대로 눈 여겨 보지 않는 풍경이다.
김진숙은 도시의 어딘가에서, 혹은 인간의 삶 주변에서 별다른 존재감 없이 묵묵히 제 생존을 영위해나가는 소박한 자연의 한 장면을 유심히 관찰했고 그러한 개나리나 담쟁이, 수양버들만을 단독으로 화면 가득 채워 넣었다. 아마도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도 엿보았던 모양이다. 그것들은 독특한 질감효과를 통해 촉지적으로 다가오면서 생명감으로 충만한 상황성으로 연출되고 있다. 나로서는 특히 비의적인 분위기를 짙게 풍기는 벽에 붙어 제 몸으로 무엇인가를 기술하는 듯이 뻗어나가는 담쟁이의 저 진동하는 선/물질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그 선만으로도 충분한 그림을, 매력적으로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박영택 (경기대학교 교수, 미술평론가)